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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파이어> 정보
영화 <어파이어>는 사랑과 낭만이 넘쳐야 할 여름 해변을 배경으로 번져오는 산불을 감지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예술가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아이러니를 담은 영화입니다. 현존하는 독일 최고 거장이라 불리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역사 3부작(바바라, 피닉스,트랜짓)'에 이어 새롭게 시작한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페촐트 감독은 물, 불, 공기를 요소로 활용한 사랑 이야기를 3부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전작 '운디네'가 물을 주제로 한 신화를 모티브로 한 사랑 이야기라면 '어파이어'는 불의 이미지 안에서 만들어진 사랑 이야기입니다. 페촐트 감독은 붉은 노을과 사랑, 그리고 동성애를 주제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코로나에 걸려 격리되었던 동안 재난 상황에 갇힌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페촐트 감독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많은 꿈을 꿨는데, 꿈속은 여름이었고 대부분 공포와 에로틱으로 뒤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독일 여름영화의 진부한 점을 바꿔보고 싶어 졌다고 합니다. 보통 미국의 여름영화는 호러영화로 영화에서 공포를 겪고 나면 죽거나 어른이 되고, 프랑스 영화에선 여름방학에 사람이 되는 걸 배웁니다. 그런데 독일 여름영화에선 "엄마, 나는 게이예요"라든가 "왜 이혼하세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잖아요"라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페촐트 감독은 터키의 대형 산불이 났을 때 피해 지역을 방문해 '죽음의 고요'를 체감한 경험과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읽으며 이번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페촐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불에 탄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요. 그렇게 죽어 있는 모습은 처음 봤죠. 기후위기로 인한 산불은 인간이 우리 지구에 하는 가장 끔찍한 짓입니다. 청년들이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름이 더 이상 없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어파이어> 줄거리, 출연진
영화 <어파이어>는 어느 여름날 숲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얼굴을 비추며 시작됩니다. 소설가인 레온과 사진작가를 꿈꾸는 펠릭스는 발트해 해변 근처 별장으로 향합니다. 조용한 휴양지를 찾아가는 두 사람은 그곳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휴식이 아닌 일을 해야 합니다. 레온은 두 번째 소설 <클럽 샌드위치> 완성을, 펠릭스는 예술학교 입학 포트폴리오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겨우 도착한 별장은 뜻밖에도 나디아(파울라 베어)라는 여성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레온과 펠릭스는 남아 있는 방을 같이 쓰게 됩니다. 펠릭스는 왠지 전혀 문제가 없어했지만, 까탈스러운 레온은 집필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난감해합니다. 다음날 아침 레온은 나디아와 그녀의 남자친구 데비트(엔노 트렙스)가 한밤중에 내는 소음에 잠을 설쳤기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합니다. 레온은 매력적인 나디아에게 첫눈에 끌리지만, 사교적인 펠릭스와 달리 레온은 나디아에게 못된 말만 뱉습니다. 붙임성 있고 사람 좋은 펠릭스는 나디아, 데비트와 금방 친해집니다. 하지만 고집스럽고 소심한 레온은 그들의 주변을 맴돌기만 합니다. 한 곳에 모인 네 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오가고 그 사이 멀리서 일어난 산불은 점점 별장 근처까지 닥쳐옵니다.
영화 <어파이어> 레온이 주인공인 이유
영화 <어파이어>는 그간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와 다르게 일상의 잔잔함과 유머러스한 로맨스 감성이 담겨있습니다. 레온 캐릭터는 페촐트 감독의 모습이 일정 부분 투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레온은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성격, 침울한 색깔의 옷차림, 친구도 없을 것 같은데 영화의 핵심 인물로 등장합니다. 나디아에게 분명 호감을 느꼈음에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나디아의 남자친구에게 툭툭 말을 내뱉거나 제안을 모두 거절하는 고집불통입니다. 펠릭스와 나디아, 데비트가 밤중에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에서 어둠 속에서 홀로 있던 레온은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을 봅니다. 창문을 열고 친구들과 소통을 선택하기보다는 커튼 뒤로 몸을 숨기는 레온은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있습니다. 그는 항상 "일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수영하러 물에 들어가지 않고, 요리도 안 하고 아무 일도 안 하지만 끊임없이 잠에 빠집니다. 타인의 출신과 직업을 깎아내리며 우월감을 얻기도 합니다. 여름이란 자연과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계절이지만, 모든 문을 꼭꼭 닫고 작가를 연기하려고 합니다. 반면 나디아는 모든 일을 기획하고 조직하고, 요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연애도 열심히 합니다. 19세기 작가들은 일하는 여자는 못생겼고 침대에서 쉬는 여자는 아름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디아는 부지런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 편견을 깨는 인물로 레온이 남성 주체의 관점에서 혼란스러움을 겪게 합니다. 영화는 폼페이 유적에서 영감을 얻은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에 담백한 내레이션과 함께 마침내 결말에 도달하고, 비로소 나비처럼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세상으로 나온 레온은 미소 짓습니다. 예술과 삶 모두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로부터 삶에 대한 중요한 가치를 배우는 레온을 통해 인간이 일에만 몰두할 수 없는 감성에 찬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